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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를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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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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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파일:모를레 전투.jpg


1. 개요[편집]


백년전쟁 시기인 1342년 9월 30일, 잉글랜드군이 프랑스군을 브르타뉴의 모르레에서 격파한 전투.


2. 상세[편집]


1342년 8월 18일,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브레스트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을 격파하고 프랑스군에 포위되었던 브레스트를 구원했다. 당시 잉글랜드군의 규모는 1350명에 불과했지만, 샤를 드 블루아는 5천에 달한다고 착각해 브르타뉴 북부로 철수했고, 윌리엄은 브르타뉴 서부 일대를 빠르게 공략했다. 뒤이어 아르투아 백작을 자처하며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부관을 맡고 있던 로베르가 파견한 800명의 장병과 합세한 그는 브르타뉴 북부로 진격했다.

그 해 9월 모르레 요새에 도착한 윌리엄은 이곳을 빠르게 공략하기 위해 기습 공격을 가했지만 수비대의 항전으로 실패하자 포위전을 준비했다. 한편 브르타뉴 북부로 달아나면서 제노바와 카스티야 용병들이 이탈하는 바람에 병력이 크게 줄어들어 버린 샤를 드 블루아는 여전히 프랑스를 지지하는 브르타뉴인들을 끌어모아 병력을 소집했다. 그는 첩보원들이 적의 규모가 2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그제야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고 3,500명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모르레 구원에 착수했다.

윌리엄은 정찰병들을 통해 적이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소규모 병력을 남겨둬서 모르레 요새를 계속 포위하게 한 뒤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프랑스군을 막으로 이동했다. 9월 30일, 잉글랜드군은 렁뮤흐(Lanmeur) 마을에서 모르레로 이어지는 길이 가로지르는 숲에 도착했다. 그들은 길을 가로질러 전투 대형을 결성했다. 기사들과 중장병들은 중앙을 차지했고, 양 측면에 장궁병들이 배치되었다. 또한 대열 앞에 참호를 파고 그 위에 나뭇가지와 풀을 깔았다.

그날 오후 3시경, 현장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렁뮤흐 마을을 통과한 뒤 적진을 향해 진군했다. 샤를은 군대를 3개 부대로 나누었다. 첫번째 부대는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진격했는데, 브르타뉴 농민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숨겨진 참호에 도착하기도 전에 잉글랜드군의 화살 세례에 겁을 먹고 후퇴했다. 두번째 부대는 기사들과 기마병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적을 향해 기세좋게 달려들었지만 참겨진 참호에 잇따라 빠졌고 장궁병들의 화살 세례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그 중 200명 정도가 참호를 넘어 돌격을 계속했지만, 말에서 내린 잉글랜드 기사들에게 압도되었고, 지휘관 조프리 드 샤르니는 포로로 잡혔다.

얼마 후, 역시 기사와 기마병으로 구성된 세번째 부대가 잉글랜드군을 향해 전진했다. 이제는 대부분 막힌 참호를 넘어 잉글랜드군을 압박했다. 이에 잉글랜드군은 숲으로 물러선 뒤 추격해오는 적들을 숲의 지형을 활용해 요격했다. 이로 인해 피해가 커진데다 많은 이들이 전투를 포기하고 도주하자, 샤를은 적진을 공략할 가망이 없다고 보고 남아있는 장병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날 전투에서 프랑스 기사 50명이 전사하고 조프리 드 샤르니를 포함한 150명이 생포되었다. 잉글랜드군의 사상자는 알려진 바 없다.

이후 프랑스군은 모르레 구원을 포기하고 물러났지만, 윌리엄은 병력 및 공성무기 부족으로 인해 모를레 공략에 실패하고 물러났다. 하지만 모를레는 나중에 프랑스군에 대항하여 잉글랜드와 손잡은 몽포르 가문 추종자들의 거점이 되었다.